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타크 왕조 (문단 편집) == 역사 == 근세 초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일대는 [[부하라 칸국]] 등 [[우즈벡]]계 칸국들과 인도의 [[무굴 제국]] 및 이란의 [[사파비 제국]]이 각축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사파비 제국은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무굴 제국 및 우즈벡인들을 몰아내며 서서히 영토를 넓혀나가던 상황이었으나 동시에 새로 정복한 지역에서 순니파 원주민들을 강제로 시아파로 개종시키거나 이를 거부하면 학살, 추방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18세기 초, 사파비령 아프간 총독 압둘라 칸에 대한 폭동이 [[파슈툰]] 길자이족[* 중세 [[아무다리야 강]] 너머 아프가니스탄에 정착한 [[할라지인]]들이 아프간인들과 동화된 후손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북인도와 벵골 일대까지 진출하여 [[할지 왕조]]를 건국하기도 했다.]의 '미르 바이스'가 주도하는 반란으로 번졌고 9대 사파비 샤였던 '후세인' [[술탄]]은 군대 2만명을 파견하여 겨우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스파한으로 압송된 미르 바이스는 샤의 환심을 사고, [[메카]]를 가서 율법학자에게 '이단인 [[시아파]] 정권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답을 듣고 온다.그 후 1709년, 샤의 허락으로 [[칸다하르]]에 돌아온 그는 자신을 생포했던 장군 구르긴 칸과 부하들을 연회에 초대하고 살해한 후, 파슈툰인들에게 메카에서 들은 말을 전하고 재차 봉기한다. 이에 샤는 정예 튀르크 기병([[키질바시]])와 조지아인, 압달리 아프간족[* 길자이족과 함께 파슈툰족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부족]으로 구성된 3만의 대군을 파견하지만, 사파비 군대는 대패하여 700명만 도주에 성공한다. '미르 바이스'는 페르시아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고 사실상 아프간의 독립을 이루어 낸 채로 1715년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압달리 아프간족도 마음을 바꿔 1717년에 반 사파비 봉기에 동참한다. 바이스의 아들인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는 같은 편인 압달리 족을 공격하기도 하는 등, 샤에게 사파비에 대한 적개심을 위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렇게 힘을 기른 후 1721년, 마흐무드의 2만에 달하는 길자이 아프간 기병은 사파비 국경을 넘어 케르만을 함락시키고 시아파의 탄압에 몸서리 치던 이란 남부의 수니파, [[조로아스터교]]도들의 협조를 얻어낸다. 1722년, 샤는 뒤늦게 4만 2천명과 24문의 대포로 구성된 군대를 편성한다. 하지만, 같은 해인 1722년 7월에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한 [[러시아 제국]]의 군대(당시 원정은 그 유명한 [[표트르 대제]]가 직접 이끌었다...)와 싸우느라 병력이 대부분 서부에 가 있던 상황이었다. 아프간족은 그해 3월 8일에 벌어진 '''굴른바드 전투'''에서 빠른 기동력으로 사피비 군대의 [[포병|포병대]]를 압도하여 5백명의 손실로 5천명을 전사시키며 대승을 거두었고, 패잔병들을 이스파한으로 밀어붙이기에 이른다. 이후 6개월 간의 포위 끝에 10만여명이 아사하여 수비 인원이 고갈되자 1722년 9월, 아프간 길자이 군대는 사파비 왕조의 수도이자 아바스 대제 당시 세상의 절반이라 불렸던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호타키 왕조의 건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샤가 항복하자 사파비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화합을 가장한 연회에 초청한 후 도륙하였고 그 자녀들도 무참히 살해했다. 이때에 늙은 샤도 마흐무드가 보는 앞에서 자녀들을 끌어안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마흐무드는 정신이상으로 지나친 폭력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살인을 일삼다가 칼을 들고 자기의 살점을 직접 잘라내는 등 가학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1725년 마흐무드는 측근들에게 살해되고, 사촌 아슈라프가 제위를 계승한다. 한편, 이란에서 사파비 세력이 소멸한 후 거칠 것이 없어진 호타키 군대는 이란 전역을 지배하에 넣고 [[러시아 제국]]을 격퇴한 [[오스만 제국]]의 군대와도 싸워 승리한다. 그 후, 당시 칼리프 지위를 지니고 있던 오스만 황제에게 이란의 정통 지배자임을 인정받는 대가로 이란 서부를 떼어주는 '하마단 조약'을 맺는다.(1727년) 전쟁을 틈타 잠시동안 사파비의 잔당이 이스파한을 회복하기는 하지만 곧 진압되고, 이란 지역은 아프간 길자이족의 호타키 왕조에 의해 안정을 찾는 '''듯'''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